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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2024년 12월 11일

VACSOM(박솜) | 박다솜 디렉터







'아트주얼리'라는 뜨거운 게슈탈트로의 안내자; VACS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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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2일 화요일




다소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는 작품들과는 달리, 밝고 쾌활하게 불쑥 악수를 청하는 그녀. 길고 곱슬곱슬한 헤어, 달달한 간식을 좋아하던 무해한 '천상 아티스트' 박다솜과의 대화.







자기소개와 근황 공유를 부탁한다.

한국의 작가 겸 아트 주얼리 브랜드 박솜을 운영하고 있는 박다솜. 최근에 마음 맞는 사진작가분과 태안에 가서 첫 캠페인 룩북을 찍었다.







브랜드 네이밍 비하인드가 있나?

이름이 박다솜이라 ‘다’를 빼고 ‘박솜’이 되었다.






슬로건이 있나?

‘브레인 메이드’라는 말을 만들어서 늘 되뇐다. ‘핸드메이드’라는 워딩은 이미 상업적인 뉘앙스라 나를 안주하게 하려는 것 같더라. 더 즉흥적이고 순수한 오리지널리티를 전달하고 싶다는 의미에서 시신경, 뇌에서 명령하는 작업을 한다는 의미로 그렇게 지어 부르면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나의 두려움, 불안감을 토닥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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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나한테 엄청 찌들어 있는 사람. 나만 알고, 나만 알고 싶은 사람이다. (‘찌들었다’는 약간 부정적인 느낌?) 단점도 있으니까. 나의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에 있어 마음의 강박을 조금 내려놓고 싶다.







해결해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감정적 기복이 심하니까 작업에도 영향을 주더라. 뭔가 고치고 싶다고 머리로도 알고 마음으로도 절실히 느낀다. 되게 큰 숙제인 것 같다.






어릴 땐 어땠나?

항상 키가 커서 육상부였다. 몸을 써서인지 쾌활하고 적극적인 꼬마였다. 엄마도 욕심이 많으신 편이라 이것저것 많이 시켜주셨고, 그중에 미술이 있었다. 상을 정말 많이 타서 초등학교 졸업식 교단에 서기도 했고, 특활 미술 선생님은 내가 꼭 이 길을 가야 한다며 학교를 그만두신 후에도 집까지 와서 과외를 해주셨었다. 자연히 예고에 진학했고, 오로지 실기로 인 서울 미대 수시에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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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론칭 전에는 무엇을 했나?

미대 진학 후 본인의 미적 감각에 대한 방향을 오래전부터 이미 잡아놓았다고 생각했고, 전부터 흥미가 있었던 패션을 배우고 싶어 성인이 되어 곧바로 시작했다. 에스모드에 입학하기 전에 1년 정도 짬이 있었다. 반도체 공장에서 3교대로 일해서 학비도 마련했고, 졸업 직후 우연한 기회로 YKK라는 지퍼 회사에서 컬러리스트로도 일했다. 그때 나는 이런 딱딱한 조직에는 안 맞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프리랜서 모델을 하면서 카레 맛집에서도 2년이나 일했다.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일주일에 한 번 쉬고 죽었다 생각하고 돈을 벌었다. 그때 많이 단단해지고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편해졌던 것 같다.






현재의 박솜 브랜드를 론칭하게 된 계기는?

'내 걸 해야지'는 항상 있었고, ‘패션이랑 미술을 어떻게 접목을 시켜볼까?’ 하는 정말 단순한 질문이었다. 예술가의 관점으로. 돈보다는 나의 꿈이나 목표만을 생각하고 막무가내로 시작했다. 수입이 불규칙하니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 모델 일이나 알바를 병행하면서 열심히 운영 중이다.







특별한 추구미가 있나?

쓸모없다고 버려지는 것들도 쓰레기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 누군가 너는 아무 능력이 없다고 해도 저마다 분명한 매력이 존재한다는 메시지를 담고자 한다. 그 매개체로 친밀한 것들을 의외의 용도로 녹여내 만나게 해서 불특정한 형태를 만들어 낸다. 기본적으로 낡은 것, 빈티지를 좋아하는데 거기에 굉장히 새것, 인조적이고 미래적인 뉘앙스를 섞는 게 재미있다. 누군가는 기괴하다거나 어떤 미생물이 떠오른다고도 하는데 딱히 의도하고 주무른다기보다 실험적으로 핫건을 쏘며 즉흥적으로 미감을 찾는다.






작가주의 마인드와 대중 간에 타협점은 어느 때쯤인가?

사람들은 보는 건 굉장히 빡센 걸 좋아하지만, 막상 잘 안 산다. 주변에서 조금 더 간소화해보라는 피드백을 듣고, 나에겐 너무 심심해 보일지라도 힘을 빼고 만들어보니 실제로 판매도 잘 되어서 신나게 새벽까지 작업하는 신기한 경험 중에 있다. 내 색깔을 흐릴까 봐 경계했던 일들이 더 건강한 자극을 주고 있어서, 기쁘게 가능성을 열었다.







내 디자인의 가장 큰 차별점은 무언가?

아무도, 나조차도 모르는 결과물을 만든다는 것. 결과물이 너무 쉽게 연상되는 것은 좀 답답하고 재미가 없기 때문에 일부러 굉장히 상반되거나 상상이 안 가는 몇 가지 재료를 같이 놓고 믹싱하면서 연구한다. 그리고 색감을 중요시하는데 그마저도 오묘함을 추구하기에 정의하기 어려우니 따라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영감의 원천?

내 과거의 습작에서 다시 영감을 받거나 그때의 만족감을 되짚는다. 그 느낌을 찾아 거슬러 가면서 스스로에게 부담을 준다. 작품의 무한한 가능성은 나만의 유토피아 안에서 유영하는데, 그 안에서는 모두가 발가벗고 아무런 편견이나 돈에 대한 걱정 없이 홀가분하고 순수하게 각자가 지향하는 내면만을 아름답게 펼치고 있다. 그 안에서 내 나름대로 비범한 조합과 형태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작업을 외부의 사람들이 흥미롭게 관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있나?

달리 같은 초현실주의 작품을 좋아한다.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의 미장센도 정말 멋지다고 생각한다.






사업을 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아직도, 계속 난관이다. 작가의 마인드를 유지하면서 브랜드로서 파이프라인을 구축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숙제다. 그리고 혼자서 하다 보니, 인스타 DM으로 오는 모든 문의를 처리하는 과정이 이제는 정말 힘들다고 느낀다. 국내외 유명인에게서 제안이 많이 오지만 빌려 가서는 태그도 안 해 주거나, 나중에는 사진 한 장 달라고 애걸복걸해야 하는 피로한 상황이 반복되니, 빌려주길 꺼리고 있고 조금 지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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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희열을 느낀 적은?

마돈나나 에이셉라키처럼 정말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아티스트 측에서 연락이 올때? 메이드가 되지 않더라도 큰 힘이 된다. 또 영국 보그 같은 해외 유명 매거진들에 인터뷰가 실렸을 땐, 그 뿌듯함이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었다.






스트레스 해소는 어떻게 하는지?

최근까지도 운동으로 풀었다. 복싱도 2년 정도 했고, 강박적으로 러닝도 매일 했다. 근데 잠을 줄여 운동을 하니 탈이 나더라. 요즘엔 잠을 늘려서 컨디션을 조절한다.






10년 뒤엔 브랜드 박솜이 어땠으면 좋겠나?

일단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브랜드는 하려는 친구가 있다면 한마디?

자신만의 무언가를 하려면 분명한 희생이 뒤따른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상업성과 예술성 중 어떤 것에 더 큰 비중을 둘 것인지 말이다. 둘 다 잡으면 좋겠지만 내 경험으로는 한 가지에 집중을 하지 않으면 맥락 없이 시간에 끌려다니다 결국 안 좋은 결과로 나타나는 것 같다. 그래서 자기 것을 시작함에 앞서 스스로에게 되묻고 답하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마음에서 진정으로 추구하는 중심을 찾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죽기 전 마지막 한 끼. 무얼 먹겠나?

어릴 때 먹던, 외할머니가 직접 만든 메주로 만들어주신 청국장. 엄청 꾸덕하고 주황색이어야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길들여졌다. 그때 ‘와 이게 사는 맛이구나! 어른들만 이런 재미있는 맛을 알았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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