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RYSTAL .
- 2024년 9월 30일
- 4분 분량
KIMZISU(킴지수) | 김지수 디렉터
'나'라는 테마로 갈망과 자유를
드레이핑 하는 스토리텔러
KIMZISU

2024년 8월 27일 화요일
정갈한 단발머리에 어딘가 정직하고 선한 느낌이 가득한 표정, 예의 바른 목소리를 타고 시스루 소재와 저지 소재가 이리저리 드레이핑 된 감각적인 탑으로 시선이 옮겨갈 때, '반전이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드는 김지수 디렉터와 나눈 이야기.
간단한 소개와 근황을 부탁한다.
브랜드 KIMZISU를 운영하고 있는 김지수. 리테일에 온 신경을 다 쓰고 있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브랜드를 론칭하게 된 계기?
영국 유학 후에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서바이벌 패션 K라는 프로그램에 참가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1등을 하게 되면서 창업 지원을 받아서 예정보다 더 빨리 론칭을 하게 되었다.

본명으로 브랜드 네이밍을 한 이유?
브랜드의 콘셉트가 어딘가 모난 구석이 있지만 잘 드러내지 않는 어떤 캐릭터의 내면을 표출하는 무드여서 '그러면 그 캐릭터가 나지 뭐야?'싶었다. 언제 어디서든, 무슨 상황에서든 그냥 항상 좀 나답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게 나의 욕망, 갈망일 수도 있고.. 일상에서 보여주기 어려운 부분을 브랜드를 통해 표출하고 싶은? 또 영국에서는 자기 이름으로 브랜드 작명을 하는 경우가 보편적이라 전혀 어색하지 않기도 했다.
본인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비교적 신중하고 차근차근 가는 스타일인 것 같다. (동행한 남편 홍우성 디렉터에게 물었다.) 배려심이 정말 큰 사람이다. 그래서 결혼했다.

어렸을 때는 어땠나?
형제도 많고 다복한 가정에서 말 잘 듣는 아이로 자랐다. 아버지는 기계 쪽 사업을 하시고 어머니는 의상과를 나오셔서 주부로 우리를 돌봐주셨다. 약간의 반항기가 있었던 언니와는 달리, 나는 순종적이고 한국 교육과정에 엄청 적응을 잘 한 스타일이었다.
패션 디자이너의 꿈은 언제부터?
중학교 때부터 동대문 다니면서 쇼핑하고 옷을 되게 좋아하기는 했는데 진로 고민은 많았다. 이과 나와서 대입을 결정할 때 한 곳만 의류학과를 쓰고 나머진 공대를 썼는데, 모두 합격하고 나니 의류학과를 쓴 학교가 가장 좋아서 그쪽으로 갔다. (무려 서울대) 그러다 졸업 패션쇼를 딱 끝내고 보니 너무 뿌듯한 거다. '디자이너가 되면 매 시즌마다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에 유학을 결심했다.
왜 런던이었나?
진로를 상담했던 교수님은 미국 파슨스 출신이셨는데 나한테 도시를 골라야 된다고 하시더라. 내가 좋아하는 도시는.. 너무 바쁜 느낌의 뉴욕보다는 다양성이 있는 런던이었다. 그중에서도 약간 더 실용적인 LCF를 선택했다.
브랜드 론칭의 꿈은 언제부터?
아마 유학 결심 때부터? 브랜드에 투영할 내 스타일을 알고 싶었던 게 가장 컸다. 런던 가기 전에도 잠깐 일을 했는데, 25살의 초년생에겐 힘들어도 뭐든 재미있고, 막 열정에 불타올라서 거의 혼자 밤낮없이 일했는다. 그때도 '아, 내 브랜드 하려면 이렇게 해야 되겠다.'라며 공부하는 마음이었다. 런던 로버트 우드에서 무급 인턴으로 일할 때도 소수 인원으로 아틀리에를 어떻게 운영하는지랑 핸드메이드의 가치에 대해서 많이 배웠다. 핸드링킹이라는 간단해 보이는 시그니처 스킬을 만들기까지 학생 때부터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는지 그 과정도 고스란히 스튜디오에 남아있어서 인상적이었다.
브랜드의 슬로건이 있나?
'Extremes in the everyday.'를 항상 생각하면서 디자인한다. 특이한 사람들이 가득한 런던에서 귀국했을 때, 마치 모든 사람들이 한 옷장을 셰어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뭔가 사람들이 더 재미있고 극적인 걸 추구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게 일상 속에서 조금씩 넓혀져가는 그런 느낌.

KIMZISU의 추구미는?
조금은 섹슈얼하고 실험적인 무드. 그 계기가 있었다. 학교에서 영국 서브컬처 신의 유명인과 합작해 여섯 룩을 디자인하는 프로젝트였는데, 우리 팀 뮤즈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학대 콘텐츠를 만드는 여성분이었다. 체모를 그대로 노출한 파격적인 의상을 입은 여성이 마스크를 쓰고 몸이 묶인 남성을 때리는 일종의 행위예술이었는데, 가레스 퓨 런웨이 모델로도 설 만큼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녀와 대화하고 콘텐츠들을 공부하면서 그 무드의 에스테틱이 주는 새로운 재미를 발견했고, 살면서 처음 느껴본 충격이 곧 자유로움으로 다가왔다. 그때부터 내 안에 뭔가가 깨지면서 광택감의 소재, 여성의 실루엣이 드러나는 드레이핑과 신축성, 비대칭적이고 흐르는 듯한 그런 관능적인 요소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게 지금의 브랜드로 표현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영감의 원천?
스토리를 찾는 편이다. 어떤 문양을 봐도 그게 어떤 스토리가 있는지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찾아보곤 한다. 그러다가 신화적인 소스에서 재미있는 게 있는지, 그걸 따라가다가 유럽의 고대 신화 중에 여성성을 나타내는 동물들을 모티브로 써보기도 하고, 그렇게 디벨롭 된 몽환적인 콘셉트에 내용을 더하고 만들어내는 걸 좋아한다.
디자인 차별화 요소는?
'Bold yet feminine.'과 드레이핑. 과감해 보이지만 정말 섬세하고 센슈얼한 감도에 신경 쓴다. 핸드 드레이핑도 정말 오직 나만 할 수 있는 영역에서 계속 발전시키고 있다. 새롭고 실험적이지만 너무 과격하고 급진적이지 않게, 조금씩 설득해서 데려가고 싶다. 그래서 일상이 그 안에서 다채로웠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서.
사업적 난관?
예전보다는 더 접근성 있는 디자인으로 변하고 있지만, 브랜드 정체성을 지키면서 사람들을 더 잘 설득할 수 있는, 그 '선'을 찾는 게 어려운 것 같다. 그리고 홍보를 꾸준히 해야 하는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해서 좀 힘들었던 것 같다. 지금도.
브랜드 하길 잘 했다고 느꼈던 때는?
팝업 같은 걸 하면서 사람들이 우리 옷을 피팅 해보면서 '와 생각보다 안 튀네. 잘 입을 수 있겠다.'라고 할 때 정말 기분이 좋다. 과할 것 같아서 꺼리다가 막상 시도해 보고 싶다는 마음을 들게 하는 게 제일 뿌듯한 것 같다. 그래서 자꾸 오프라인에서 입혀보고 싶다.(웃음)

스트레스 해소는 어떻게?
힘들어도 잘 쉬지 못하는 성격인데 결혼을 하면서 좀 스스로를 놓아준 것 같다. 남편(홍우성)은 집에서는 꼭 편안하게, 잠도 잘 자야 하는 사람인데 나도 어느샌가 뭔 큰일이 있어도 집에 오면 남편이랑 장난치고 웃고 떠들고 편안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뭔가 끙끙거리고 있으면 남편이 듬직하게 해결해 주기도 해서 좋다.
사업적 난관?
특별하게 어떤 때가 있었다기보다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이 힘들었다. 요즘 고민은 하고 싶은걸 하면서 비즈니스도 잘 해내는 일. 그건 소수들만 이루는 것 같더라. 그리고 팀 빌딩이 참 어렵다. 그래도 팀원들이 경제적인 것 외에 다른 가치들도 얻어 갈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고 싶다.
죽기 전에 딱 한 가지만 먹을 수 있다면?
요리를 못 하는 엄마가 만든 어린이 맛 된장찌개랑 생일마다 해주시던 오징어튀김. (홍우성: 놀란 얼굴로 아내를 바라보며 '자긴 진짜 따뜻하다..' 그리고 그의 죽음의 밥상 원픽에 모두 폭소)

10년 뒤엔 브랜드가 어땠으면 하는지?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회사가 되어있었으면.. 그리고 돈 많이 벌면 남편이 하고 싶다던 그 일도 꼭 할 수 있게 도움이 되면 좋겠고, 사업을 하시는 아버지와 또 가족들과 모두 돈독하게 잘 성장하면 좋겠다. 가능할지 모르지만 남편과 나 둘 다 성공해서 쌍둥이 빌딩을 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 (웃음)
브랜드를 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한마디 해준다면?
주저할 시간에 저질러라. 그리고 팔 곳을 찾아라.








